2022년 한 해를 마치며

Override the Ego, 겸손으로 뛰어넘다.

올해의 작업. ELLIA 게임 인터페이스, 오토메 나이트 2 포스터, 아크스타 브랜딩, 엘리아 팬아트, 오사카 우메다 사진.

Override the Ego, 겸손으로 뛰어넘다.

가벼운 머리말

슬슬 때가 되었기에, 또다시 글쓰기 도구를 열어 "올해를 마치며"를 쓸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문득, 이 글을 몇 년 동안 쓰고 있었는지 궁금해져 이전 블로그들을 한번 뒤적여봤습니다. 찾아보니 이런 연간 회고 비슷한 무언가를 올해로 7년째 쓰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블로그 공모전에서 상을 타 문상을 받고 싶어서~"라는 지극히 욕망 넘치는(...) 이유로 썼던 것이었는데 어느새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여하튼 찾은 김에 한번 쭉 읽어보니, 이게 생각보다 흥미로웠습니다. 처음 썼던 글에서 느껴지는 묘한 고등학생 감성, 모아보니 굉장히 길었던 번아웃 기간, 점점 달라지는 문체와 그래픽 스타일, 어느 순간 붙여지기 시작한 올해의 한마디 등.. 근 몇 년간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는지를 볼 수 있는 재밌는 이야기가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즉흥적으로 써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어떤 것들을 했는지를 가볍게 뒤돌아볼 수 있어 다음 해에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어김없지만, 빠르게 지나간 해였던 만큼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2023년을 향한 백서로 "2022년을 마치며"를 써보고자 합니다.


한 해를 전체적으로 되돌아 본다면

Humility Respect.
자존심을 다스리고 겸허히 존경하리.

다른 해도 12월쯤 되면 "와 이번 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올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올해는 오랜만에 즐길 것을 다 즐겨보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본 나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팀을 만나며 재밌는 일을 해왔습니다. 이것이 더 값졌던 이유는 이런 만남 사이에서 저와는 여러 단계 높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A Fear.

다음에 더 풀어 볼 날이 오겠지만, 요약하자면 제 동기의 강력한 원동력은 바로 "공포"입니다. "한 발짝 뒤에 있는 사람에게 추월당할까 봐, 한 발짝 앞에 있는 사람을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까 봐"라는 염치없는 생각으로 일에 임합니다. 하지만, 아예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나 수백 걸음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불안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 전의 나를 보며 느낀 것은, 이럴 때 충격은 받으면서도 여전히 알량한 열등감으로 분발한 느낌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크게 주변 환경이 바뀌고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런 짧은 생각으로는 그들과 절대 동등해질 수 없을 것이라 깨달았습니다.

Learning to the Pro.

깨달았으니 올해 안에 그들을 따라잡았는가? 그것은 아쉽게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 그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이어지고 있고, 이것은 제가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순간이라 믿고 있습니다. 2022년도 그랬듯 2023년 또한 끝없이 존경을 표하며, 그리고 그들의 프로다운 방식과 결과 등을 꼼꼼하게 공부해가며 배워볼 요량입니다. 올해는 그런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이 많았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로서 2022년은

A New Chapter
새로운 챕터.

이번 해는 당연하게도 원래 하고 싶었던 일도 많이 했지만, 그보다도 이전까지 잘 안 했거나 처음 해보는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주력인 모바일 앱뿐만 아니라 데스크탑 앱을 디자인해보기도 하고, 평소 로망을 가지고 있던 게임도 디자인해보고, 브랜딩 작업도 해보고, 사진도 찍고,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쇼핑몰 페이지도 만들어 보는 등 하나하나가 겹치지 않고 재밌는 일이었습니다.

Challenge the new Product.

회사에서는 그렇게 원하는 대로, 결국 완전히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두 명에서 페어로 디자인 작업을 해보는 것도, 데스크탑 앱을 완전히 밑바닥부터 다시 만드는 것도 처음 해보는 것이라 항상 초심자의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초심자의 기분을 느끼는 것이 제가 늘 일에서 바라던 가치였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로켓에 타는 것이 아닌 로켓을 만들어 발사하는 것. 이미 한 번 목격한 충격은 잊을 수 없었고, 저는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양한 제의와 보장된 직장을 우선순위에서 모두 제하고 선택한 이 프로젝트가, 부디 제가 한 번 더 설렘으로 격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디자인 섹션

한 반년가량은 원래 하던 일과는 다른 업무를 많이 담당했습니다. 기획전 브랜딩을 진행해보기도 하고, 제품과 강아지 사진을 직접 찍어서 쇼핑몰용 제품 소개 이미지를 만들어 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 작업했습니다. 사실, 원래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하는 것이라 조금 불만이었지만, 막상 다 완성되어 고객에게 보이는 모습을 보면 또 기분이 풀어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여기서 배운 것들을 본업에서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ELLIA의 UI 이미지
(C) Arcstar. All right reserved.

또다시 게임 디자인에 도전했습니다. 이전에 OverRapid를 함께 만들었던 Arcstar에 기회가 되어 다시 참여했습니다. 몇 년 만에 돌아온 팀이라 알고 지내던 사람보다 처음 뵙는 분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인지 더 들뜬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작업해보는 게임 UI 디자인은 굉장히 어렵지만, 새롭게 받아들이며 디자인하는 부분이 많아서 왠지 흥미로운 과제가 계속 주어지는 느낌이라 기뻤습니다. 작업은 이제 서서히 마무리되며, 내년에는 세상에 모습을 비칠 예정입니다. Arcstar의 새로운 게임인 "ELLIA", 많은 기대를 부탁드립니다.

(C) Arcstar. All right reserved.

Arcstar에 돌아오며, 브랜딩을 새롭게 진행했습니다. 제가 나갈 때쯤 만들었던 로고를 지금까지 사랑하고 사용해주셔서 정말 고맙기도 했고, 나간 이후부터 멀찍이서 팀을 지켜보며 "다음에 돌아간다면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라 생각했던 것이 있어 바로 진행해보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던 지금까지의 Arcstar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모습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두 개의 별에 담아 표현해보았습니다. "STAR VOYAGER"라는 마음 다짐에 맞게, 2023년도 끝없이 저 너머를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타쿠로서 2022년은

최근 몇 년의 성공적인 확장판
오프로드에 서 있는 레이 터보.

작년에 차를 선물 받은 이후 1년이 지났습니다. 회사가 집에서 훨씬 멀어지다 보니 키로 수가 훌쩍 늘었고, 그렇다 보니 이제 운전에 나름 익숙해져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고가 무서워서 전보다 더 얌전히 다니고 있답니다.

숯을 넣어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미니 화로

그래서 이번 해는 못 해도 분기마다,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가서 펜션에서 고기를 굽거나 당일치기 캠핑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특히 이번 캠핑에서는 화로 같은 장비를 더 준비해봤는데, 쏠쏠하게 쓰이며 재밌는 추억을 만들어주었습니다.

FUJIFILM X100V 카메라가 창틀에 놓여져 있는 모습

원래 쓰던 카메라인 A7M2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파트너인 FUJIFILM X100V를 들였습니다. "카메라가 너무 커서 안 들고 다니다 보니 사진을 안 찍게 된다"는 느낌이 들어, 보다 가벼운 렌즈 일체형 카메라로 다시 회귀했는데, 정확하게 추측했는지 이번 해는 유난히 사진을 찍으러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한 번쯤은 가봐야지~"를 수년동안 말하고 안 갔던 스타필드도 다녀오거나, 제주도 여행을 무계획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집중이 안 돼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적지 않은 지출이기도 했고 한 달 반 동안 기다리며 샀던 카메라지만, 그만큼 저에게 새로운 취미를 완성하게 해주어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명일방주 프로필. 게임 아이디 앳에리큐#2623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게임을 안 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고, 지금까지 너무 생산적인 일에 집착했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 같아서, 느릿느릿 여유롭게 해볼 만한 게임을 건들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명일방주"를 다시 시작했는데, 쉬는 시간에 적당히 오토 돌리면서 캐릭터 키우는 것도 할만하고, 그러다 가끔 각 잡고 게임을 할 때도 재밌어서 마음에 듭니다. 마치 옛날에 "확밀아"를 할 때가 생각나서 조금 웃기기도 합니다.

내년에도 게임을 여럿 해볼 생각입니다. 오픈 월드로 바뀌어서 이제 주말 안에 클리어하기 힘들어진 포켓몬스터 바이올렛도 설렁설렁 해야 하고, 끝없이 배송이 미뤄지고 있는 Steam Deck(스팀덱)이 오면 그동안 사놓고 안 하고 있었던 인디 게임을 잔뜩 할 생각입니다.

2022년간 본 애니메이션이 정리되어 있는 Notion 시트

이번 해의 절반은 "공각기동대"에 빠져 있었습니다. 작년에 지인이 강추해주셔서 "한번 봐 볼까~"하고 시청했는데, 어느 새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올해 나온 "SAC_2045"도 갑자기 3D로 바뀌어서 조금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역시 공각기동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독특한 주제를 던져주어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시도니아의 기사"시리즈도 올해 재밌게 봤습니다. 공각기동대 이후로 계속 SF에 매말라 있기도 했고, 소재도 굉장히 좋아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라 관심있게 봤습니다. 우주에 표류된 인류, 외계인과의 전쟁, 그 사이 일어나는 독특한 전개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꼭 한번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연말에는 "사이버펑크:엣지러너"가 나와서 한동안 "싼데비슷한..초보적인 임플란트다.."라고 궁시렁거리며 다니기도 했고, 지금은 기존 건담과는 한껏 다른 "수성의 마녀"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여러 앨범이 모여 있는 CD장

#한한앨은 계속됩니다. 올해로 벌써 29번째가 되며 2년 반 동안 꾸준하게 앨범을 모으고 있답니다. 이번 해에는 특히 의미 있는 앨범을 많이 구매했습니다. 어릴 적에 엄청나게 좋아했었던 애니메이션 주제가인데 아마존에 딱 한개가 남아있어 구매한 "이시카와 치아키의 First Pain", 십 년 넘게 좋아하는 노래 1위였던 "페이란의 WHITE justice", 올해 가장 많이 들은 노래인 "Qaijff의 愛を教えてくれた君へ"등 간직하고 싶은 노래를 가지게 되어 기뻤습니다.

여러 권의 e북이 놓여져 있는 리디북스 서재

여러 가지 일이 있다 보니, 이를 핑계로 올해는 참 책을 안 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사두고 계속 묵혀두던 소설들을 하나둘 읽었는데 이것들이 짧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한참 추울 연초에 읽었던 "설국"은 차가운 것인지 따뜻한 것인지 어려운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스키마와라시"는 처음 읽을 때는 지루했지만 점점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서 C. 클라크의 책을 읽었는데, "라마와의 랑데부"는 미지의 것과 접촉하는 경험을 하나의 항해기처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은 N. 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읽고 있는데, 처음에는 소위 "자기네들만 아는 얘기"를 하는 느낌이라 한 권만 읽고 하차하리라 다짐했었습니다. 그런데 기승전을 해놓고 결을 다음 책에 남겨두다 보니(...) 결국 지금까지도 읽고 있답니다. 첫 권은 매우 독자에게 매우 불친절하고 내용도 많지만, 그다음 권부터는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다양한 인물의 시점, 다양한 시간대를 넘나들며 인물의 됨됨이를 묘사하다 보니 점점 세계관에 몰두되는 느낌입니다.

올해 못읽었던 만큼, 다음 해엔 찜해두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독파해나가며 한달 책 한권을 꼭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아야겠습니다.

오사카 시 우메다 지구의 도심 사진

드디어 3년 만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다시 만난 오사카와 고베, 그리고 교토는 그리운 분위기가 나기도 했고, 사뭇 다른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겠지요? 다음 해 역시 열심히 일하고, 지금과 같은 시기에 훌쩍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워보아야겠습니다.


사람으로서 2022년은

Render the Over Stage.
Render the Over stage.

"이상을 실현하라", 제가 참여했던 Arcstar의 리듬 게임 "OverRapid"의 옛 슬로건입니다. 올해에는 이 단어가 참 와닿습니다. 그동안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한 것들을 자의로나 타의로나 도전해보게 되었고, 이전에 왔었던 번아웃에 보란 듯이 최근 몇 년간 심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크게 도약할 수 있는 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만났던 높은 곳의 사람들을 언젠가 뛰어넘을 수 있도록, 한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을 실현해나가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저번 해에는 "정의"를 내렸다면 올해는 비로소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으로 만난 새로운 지평에 일관된 겸손의 자세로 서서히 앞으로 향했고, 이런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삼아 다음 해에는 더 멀리 전진하고자 합니다.


2022년이 단 며칠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2023년엔 어떤 재밌는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지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됩니다. 올해의 도약을 축하하며, 이젠 추억으로 떠나보내고 다음 해의 또 다른 도전을 스스로, 그리고 여러분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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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minon Canoness. Create a space of possibilities. for so that the all trailblazers may bloom the ideas.